능가산 내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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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海眼)은 맑디 맑게 퍼져나가는 산사의 종소리처럼 청아하게 일생을 살아간 사람이다.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도 종소리와 함께 염불소리, 목탁소리, 그리고 스님들이 드리는 예참(禮懺) 모습, 늙은 스님네가 마루턱에 기대앉아 조는 모습이 좋아서였으니, 그는 유달리 감성이 뛰어났던 성정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훗날 그는 출가의 연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난 새벽 종소리와 목탁소리에 꼬여서 머리를 깎았어. 마치 수백년이 되어 가지와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줄기만 남은 고목처럼 알맞게 마른 홍안의 노승이 법당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얼마나 좋던지... 그것은 어느 선인도(仙人圖)에서나 볼 수 있는 한폭의 그림이었지. 마치 나는 부귀영화도 싫다, 천당 지옥 그런 것 내 알바 아니다라는그런 광경이었으니까」<소박한 출가>의 모습만큼이나 해안의 삶은 청범하고 온화했다.

그는 <평상심이 곧 도>임을 일상 생활속에서 여실히 드러내보였다.
해안은 일생을 소박하고 가난한 생활로 보냈다. 복색도 특이해서 웃옷은 고름대신 매듭 단추를 달아서 입었고, 바지는 약간 짧게 해서 대님을 매지않은 채로 입었다. 그 까닭은 한마디로 <간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살림살이가
가난을 즐기며 특징없게 경영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상 생활속에 깃들여있는 치열함은 역대 어느 선사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무서웠다.
「절은 전쟁을 하는 장소야. 절이라고 하면 고요하고 한가로운 처소를 생각하기 쉽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막다른 골목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라는 걸 명심해야 돼. 적이 누구냐? 바로 삿된 것이지. 이 삿된 생각과 싸워서 이겨야만 되는 거야」

해안은 190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성봉(成鳳)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창 한학에 열중하던 무렵 성봉은 어떤 붓장수로 부터 변산의 내소사(來蘇寺)라는 절에 『맹자』를 천번이나 읽은 고매한 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모의 허락과 배려로 내소사에 유학간 성봉은 한학자 고찬(高讚) 선생을 만나 한학 공부를 하던 도중, 당시 내소사에 주석하며 가람을 크게 일으킨 만허 화상과 해후했으니 이 만남이야말로 불연의 시작이요, 성봉이 한국 선불교의 토대를 굳건히 한 대선사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14세 때였다. 첫눈에 예사 아이가 아님을 알아차린 만허 화상은 성봉을 흔쾌히 제자로 삼았다.

절에 눌러 살면서 스님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점차 매력을 느낀 성봉은 3년 후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축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었다.불연을 맺은지 4년, 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지 불과 2년째 되던 해에 해안은 눈이 열리는 경지를 맛보았다.

한 해가 저물어 가던 1918년 납월, 성도절(成道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날)을 앞두고 연례행사로 열리는 7일 용맹정진에 몇몇 학인들과 함께 참여해 견성(見性)의 일미(一味)를 맛본 것이다.
당시 선원 조실이었던 학명(鶴鳴) 선사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은 해안은 절박한 각오로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막막하고 숨이 콱 막힐 것만 같은 요지부동의 은산철벽을 어떻게 뚫어야 할 것인가.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찌 사람과 하늘의 스승을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스물이 채안된 약관의 수행자였지만 결가부좌를 하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화두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먹이를 쫓는 맹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해안은 의심에 의심을 더해가며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벼랑끝으로 내몰았다. 하루, 이틀, 사흘... 스스로와 타인의 구분조차 사라지는 경계가 차츰 다가왔다. 그러기를 7일 밤낮. 그러나 이미 시공이 끊어진 경계에 들어있는 해안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는 경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 소리에 이어 범종 소리가 들린 후, 방선(放禪)을 알리는 선방의 죽비소리가 <탁! 탁! 탁!> 울리는 순간, 해안은 요지부동의 은산철벽이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환희의 세계를 만난 것이다.

「아, 나는 이제 대자유인이 되었다. 천 길 낭떠러지도 영원할 것 같은 은산철벽도 모두 한낱 눈송이처럼 사라져 버렸도다」 이 순간의 기쁨을 해안은 이렇게 노래했다.

이후 해안은 동국 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 학림에 입학해 2년 간의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내외전(內外典)을 두루 마치고, 선미(禪味)를 경험한 그였지만 조금도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22년 겨울, 해안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삭풍을 뚫고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중국에 유학했다. 중국의 선지식을 널리 친견하고, 탁마하는 한편, 북경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타국에서의 정진과 수행은 말 그대로 형설(螢雪)의 과정이었다.

3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내소사로 돌아온 해안은 오랜만에 행장을 풀고, 은사 만허 화상을 정성껏 시봉하며 사제의 정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승의 간곡한 당부를 거역하지 못해 내소사 주지직을 맡았지만, 조실 학명 선사가 월명암에 주석하면서 선도량을 개설하자, 자주 월명암으로 자리를 옮겨 안거 수행에 들었다.
천성이 선사요, 교화사였던 까닭에 주지직 같은 것은 해안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금산사 주지에 추천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종무 행정은 실무를 보는 스님들에게 일임했다. 본사인 금산사 주지로 있을 때에도 사내에 서래 선림(西來禪林)이라는 선원을 개설해 참선 수행과 지도, 후학 및 납자 제접에 전념했다. 내외전(內外典)은 물론 외국에 유학해 견문을 넓히고 한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기 때문인지 해안은 교육 사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31년 내소사 앞 입암리 마을에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설립해 미취학 아동과 무학자들을 교육하는 등 문맹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35세 되던 해에는 백양사의 본말사 순회 포교사의 책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중생 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목소리가 선천적으로 맑고 사람을 감동시켜 끌어들이는 독특한 힘이 있는 데다가 해박한 지식과 밝은 선지(禪旨)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국 전쟁을 겪은 후 해안은 토굴에 은거하며 두문불출 오직 선정삼매에 들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3년 동안을 보임 정진으로 일관했다. 공양 시간에 맞춰 시자가 식사를 올려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부와의 교섭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당시 해안이 보여준 초인적 수행력에 혀를 내둘렀다.

해안은 언제나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無有定法), 시시비비에 상관하지 않는 초연한 입장을 실행에 옮겼다. 때와 조건에 따라 알맞게 맞추고, 고정관념없이 대중의 근기에 따라 교화에 나섰다.
어떤 때는 무섭기가 서릿발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자하기가 봄바람 같았다. 때로는 방망이를 휘둘렀고 때로는 벽력같은 할도 사양하지 않았다. 선정에 들어있는가 싶으면 문득 북과 광쇠를 쿵쿵 두드리며 염불 삼매에 취하기도 했다. 달이 밝으면 시를 짓고 다정한 도반을 만나면 밤을 새워 곡차를 즐기기도 했다.

환갑을 맞던 해, 해안은 갑자기 자신의 장례식을 치렀다.
가상여(假喪與)가 만들어지고 마치 초상이 난 것처럼 장례 의식이 실제로 거행됐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일단 매듭짓고, 환갑 이후의 생은 다시 태어났다는 각오로 시작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이었다. 왔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지은 업을 씻고 새롭게 완벽한 수행자로서 거듭나겠다는 해안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것이다. 이같은 수행 이력들로 인해 해안은 그가 주로 활동해온 호남 지역에서 대도인(大道人)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묵담(默潭)이 전주를 중심으로
선풍을 드날렸고, 구산(九山)이 광주와 순천을 중심으로 효봉의 가풍을 이어 갔다면, 해안은 김제와 부안을 무대로 선풍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금강경』은 독보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안이 주석을 한 『금강경』이 오늘날까지 인전받고 있는 것은 그의 『금강경』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걸출했던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의 후학들은 언제나 법회 뒤에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1960년대 말, 해안을 만나 유발 제자가 된 서돈각 박사(대한불교 진흥원 이사)도 해안을 <선교(禪敎)에 두루 조예가 깊은 걸출한 선지식>으로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때론 봄볕처럼 따뜻하고 때론 서릿발처럼 냉철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토론을 즐겨 하는 어른이었다고 한다. 서 박사는 당시 해안으로부터 받은 무애(無碍)라는 법명과 법어를 평생 간직하며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 서 박사가 해안으로부터 받은 법어는 이렇다.
후학들을 가르침에 있어 해안은 명쾌한 논리로 핵심을 설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러 해 수행을 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물건을 따라가기 때문(迷己逐物)이라며, 꾀꼬리가 울면 자기를 잊어버린 채 꾀꼬리 소리를 따라가고, 장구 소리와 노랫가락이 들려오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좇아가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무(無)자를 찾든, 은산철벽을 찾든 따라다니면서 찾지 말 것이며, 흙덩이를 좇아가는 개와 달리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좇는 사자처럼 공부하는 이가 남을 따라 다니지 않고 자기를 잃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깨달음이란 단기간에 죽기를 무릅쓰고 이뤄내는 것이지 장기간 계획을 짜서 얻는 것이 아니라며 납자들의 용맹정진을 재촉했다. 해안은 1주일이나 보름단위의 정진을 고집했다. 이러한 소신은 자신이 1주일동안 무섭게 정진한 끝에 이뤄 낸 견성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해안은 언제나 일하기를 즐겼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정신이 그에게는 일상 생활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가르침을 배우러 내소사에 왔던 납자들 중 일부는 일을하는 것이 싫어 절을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일상은 그가 평생을 살았던 변산의 모습처럼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위에서는 선지식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한 채 참 스승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 했다.

해안이 후학이나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히 간절했다. 오랫동안 곁에서 시봉을 했던 제자 원명이 보낸 서신에 대한 몇편의 답신에는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해안은 불자들에게 불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삶을 살라고 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해안은 재가 신도들에게도 차별없이 가르침을 전했다. 재가자이든 출가자이든 누구나 견성할 수 있다는 지론을 펼쳤다.이런 연유로 그의 주변에는 많은 재가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1968년 봄, 따르던 재가불자들이 모여 불교 전등회(佛敎傳燈會)를 조직하고 계절마다 정진 법회를 개최해 7일 또는 21일 참선 정진을 시작하자, 이 모임의 회주가 되어 성의를 다해 지도했다.

해안은 어떠한 일이 닥쳐도 초연한 자세를 잃는 법이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림이 없는 숭고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평상심을 유지했던 일화는 그의 성품을 잘 알려주고 있다. 북한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보따리를 챙겨 피난을 가기에 바빴다. 모두들 부산을 떨었지만 해안만은 태연한 얼굴로 서래 선림에 남아 묘목 접목에 열중했다. 이를 본 동리의 한 노인이 물었다.

「스님, 피난은 안가고 무엇을 하고 있소?」
「감나무 접목중이요」
「원 참, 난리통에 무슨 접목이란 말이요?」
「그렇지가 않아요. 농부가 씨를 뿌릴 시기를 놓치면 그 해 농사를 망치듯이 감나무 역시 지금 접을 붙여주지 않으면 장차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노인장께서는 어찌 죽는 법만 아시고 사는 법은 모른단 말이오」
「......」
「이 감나무야 사람이 죽고 사는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우리가 감을 못따 먹으면 남이 따먹을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까막까치와 같은 날짐승이라도 쪼아 먹을 게 아니겠소」


1974년 3월 7일, 해안은 자신의 일흔 네번째 생일과 불교 전등회 창립 4주년을 기념해 열린 법회에서 운집한 불자들에게 자신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마지막 법문을 내렸다.

「여러분의 수행은 향상 일로에 있고, 이제는 내가 없더라도 정진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등회 회원 여러분들은 혼탁한 세상에 등불이 되고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부디 정법을 수호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정진해서 부처님의 등불을 온누리에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이틀 후 새벽, 운집했던 불자들이 모두 떠나고 몇몇 불자들만이 남아있던 서래 선림에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도량석 목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예불이 끝나자 대중들은 해안의 안부를 살피고자 조실 안으로 모여들었다. 방안에는 무거운 기운이 맴돌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 오늘 갈란다」
나지막한, 그러나 담담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린 것은 해안이었다.
「이제 손님도 다 떠났고 조용해서 좋구나. 그제도 말을 했지만 내가 떠난 후에도 공부들 열심히 하고 전등회를 잘 키워야 할 것이야」해안은 수제자 혜산 수좌를 바라보았다.
「남은 일은 혜산에게 부탁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
순간 슬픔을 이기지 못한 한 제자가 흐느꼈다. 울음소리를 들은 해안이 그를 타일렀다.
「울지 마라. 모두가 이렇게 가고 또 오는 것. 이제 병든 몸이 더 있어봤자 짐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죽거든 제사는 생일날 지내라. 실은 생일날 가려했지만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아 오늘 가는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리고 혹 사리가 나오더라도 물에 띄워 없애 버리고. 비(碑)같은 것은 일체 세우지 마라」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해안은 열반송이라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애타는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해 게송을 읊었다.
이윽고 해안은 피로한 기색이 되어 자리에 누웠다. 이내 호흡이 거칠어졌다. 손이 잠시 들리는 듯 하더니 힘없이 떨어졌다. 열반을 알리는 종소리가 봉래산 골짜기에 은은히 번져 나갔다. 그날에는 유달리 새벽 하늘이 떠오르는 햇빛에 붉게 물들었다.